내 인생의 한마디

국경을 초월한 나눔, 충남 아너 2호에 빛나는 인우산업조경(주) 전영채 회장 “ 사람만큼 중요한 건 없기에 오늘도 나눕니다”

성공과 실패가 날실과 씨실처럼 촘촘하게 엮인 파란만장하던 삶,
그러나 포기란 없었다. 사람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여기며 오늘의 성공을 일군 전영채 회장의 뜨거운 나눔 이야기.

강보라 사진 이승재

인정 넘치는 회장님

인우산업조경(주) 전영채 회장은 입지전적 인물로 통한다. 충남 논산이 고향인 그는 맨손으로 상경해 샐러리맨의 창업 신화까지 쓴 기업인이기 때문 이다. 물론 여기까지 듣는다면 흔한 성공 스토리일수 있다. 하지만 전영채 회장은 자신의 성공에 그치지 않고, 지금껏 이룬 부를 기꺼이 사회와 나누어 왔다. 그리고 그 나눔은 현재진행형이다.
“돈을 원 없이 벌어도 봤고, 원 없이 써보기도 하고, 또 휘청일 정도로 잃어도 봤어요. 그래도 이날 이때까지 헛되게 써본 적은 없어요. 진짜 재산은 돈 이 아니라 사람이란 걸 알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돈도 벌 수 있었고요.”
전영채 회장은 결정적 순간마다 돈이 아닌 사람을 선택하는 삶을 살아왔다고 말한다. 돈을 얻고 사람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면서. 그가 말하는 사람은 결코 사업적 득실만 따지는 것이 아니다. 형편이 되는 대로 형제들을 기꺼이 도왔고, 회사로 찾아온 고향 사람들을 빈손으로 돌려보낸 적이 없다.
그의 운전 기사는 40년 넘게 근속 중이다. 따뜻한 온정과 넘치는 인심이 전 회장의 삶 곳곳에서 묻어 난다. 그에게 나눔은 그렇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끝없는 나눔, 국경도 넘어

전영채 회장은 2011년 충남 사랑의열매 아너 소사 이어티에 가입한 2호 회원이다. 또 2014년에는 그의 아내가, 2016년에는 2남 1녀 중 장녀가 아너 소사이어티에 가입하며 가족 아너라는 영예로운 타이틀도 보유하고 있다.
이어 아들 둘도 아너에 가입 할 계획이라 충남의 새로운 나눔명문가를 예고한 다. 그뿐 아니다. 2008년부터 충남 사랑의열매와 인연을 맺어온 전 회장은 논산시 관내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을 위해 매년 캠페인 기간마다 2,000만 원씩 기부하며 나눔에 동참해왔으며, 수시로 저소 득층을 위한 생계비와 의료비 등을 지원하고, 겨울이면 어려운 어르신들을 위해 내의나 양말 등 겨울용품까지 챙겨왔다. 설·추석 명절은 기본이고, 지역 내 굵직한 이벤트가 있을 때마다 빠짐없이 힘을 보탠 것도 전 회장이었다.
“2003년부터 사랑의열매에 기부하고 있었는데, 그게 서울이었던가 봐요. 하루는 변호사인 고향 후배를 만났는데 ‘왜 이렇게 하고 계시냐’며 아너 소사이어티에 대해 말해주고, 충남 사랑의열매도 알려주더군요. 처음부터 충남에 했다면 아마 제가 1호 아너였을걸요?(웃음)” 몇 년씩 기부해오면서도 타이틀에 개의치 않은 모습에서 사심 없이 나눔을 실천해온 전 회장의 마음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의 나눔은 고향 돕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굴곡진 현대사를 관통한 삶

전영채 회장은 서울 서대문구에 위치한 한길봉사 회에서 수년간 어르신들을 위한 무료 급식 사업에 봉사와 후원을 해왔고, 동북아교육문화협력재단을 통해 연변과 평양에 과학기술대학을 설립하는등 북한 교육 지원 활동까지 하고 있다. 또한 그의 아내와 딸은 함께 캄보디아에 기술학교 및 꼬마비 전센터 건립 지원금을 후원하는 등 국제적인 나눔 에도 앞장서고 있다. 그야말로 국경을 초월한 전영채 회장 일가의 나눔이다. 이렇듯 북한까지 돕고 있는 전 회장에게도 남모른 아픔이 숨어 있다.
“6·25전쟁 때 큰형님이 북한 의용군으로 끌려가셔서 못 돌아오셨어요.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큰형님이 제겐 아주 각별했거든요. 피난 시절 제가 다리가 아프다면 목말을 태워주던 게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엄혹했던 시절이었다. 전 회장은 결혼 후 큰 딸을 낳고 출생신고도 채 하기 전에 끌려가 조사도 받고, 감시도 당했었다. 그래도 무섭거나 겁나진 않았다고 했다.
“그땐 배포가 좀 있었나 봐요.(웃음) 자꾸 찾아오는거 보면서 그저 ‘아, 형이 살아 있구나’ 직감만 했죠.
북한을 돕는 거창한 이유 따로 없어요. 내 형이 살고, 내 조카가 사는 땅이기 때문이에요.” 전 회장은 2000년 서울 잠실에서 있었던 남북 제2 차 상봉식에서 큰형을 만났다.

돈을 많이 벌어도 봤고, 크게 잃어도 봤지만 헛되게 써본 적은 없어요. 돈이 아무리 많아도 부모, 형제, 자식 다 의상하면 무슨 소용이에요. 나눠보세요. 우선 마음이 편해요. 정말 편해요! 그게 부자죠, 진짜 부자.

우리가 언제 돈 있었어?

1968년 삼부토건에 말단 사원으로 입사한 전영채 회장은 계열사 사장까지 오른 후, 아동복 전문 브랜드 (주)해피아이를 창업하고 인우산업조경까지 일궈냈다. 한 줄로 짧게 요약한 그의 삶 속에는 결코 요약할 수 없는 숱한 일이 들어 있다. 거친 건설 현장은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았고, 부상당한 인부들은 보상금에 불만을 품고 재정을 담당한 그의 사무실로 쳐들어오기 일쑤였다. 빨간색 잉크를 뒤집어쓰는 일은 다반사, 흉기로 위협받는 일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인부들을 홀대한 적이 없다. 돌아가는 길에 차비를 챙겨줬고, 경비 일자리 라도 알아봐줬다.
“투자가 잘못되어, 회사 경영에 큰 어려움을 겪었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휘청이니까 아내가 위로하며 그러더군요. 우리가 언제 돈 있었냐 고. 뚝섬 신혼집도 수해가 나 다 떠내려가고 맨손 으로 시작하지 않았냐고요…. 그랬어요. 핏덩이 큰딸 겨우 안고 몸만 빠져나왔으니까.”
전 회장 부부는 이미 장기 기증과 연명 치료 거부 신청까지 모두 마쳤다. 그리고 지금껏 그래온 것처럼 꾸준히 나누는 삶을 살아갈 예정이다. 마지막 으로 나눔 철학에 대해 물으니, 당연한 일을 뭐라고 답하느냐며 난처해한다. 그런 전 회장의 표정이참 맑았다. 큰돈을 벌었으되, 스스로 말한 것처럼 헛되게 써본 적 없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까지 헛되이 살지 않을 것이다. 나눔을 퍼뜨리는 전영채 회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