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새 달력을 받으면 나도 모르게 11월 15일에 가장 먼저 표시해두는 버릇이 생겼다. 사랑의열매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이자 삼청동 ‘서울서 둘째로 잘하는 집’을 창업하신 故 김은숙 대표님의 기일이다. 많은 이에게 ‘팥죽 할머니’로 더 익숙한 기부자님이기도 하다.
평생 10억 원이 넘는 거액을 기부하신 대표님의 나눔은 고3 무렵 조현병을 앓기 시작한 딸을 돌보며 시작되었다고 한다. 정신 질환자와 그 가족의 아픔을 몸소 겪으신 대표님은 어떤 방법으로도 해결할 수 없다면 나누어야겠다는 마음으로, 2009년 5만 원권 스무 장을 봉투에 담아 서울 사랑의열매를 찾아가셨다. 이후 팥죽을 팔아 번 돈은 물론,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이 남긴 아파트까지 처분해 기부하셨다. 그렇게 전해진 대표님의 소중한 성금은 내가 근무하는 서울시 은평병원에서 노숙인과 이주노동자, 무연고자 등 의지할 곳 없는 이웃의 수술비와 치료비 등으로 사용돼왔다.
치료를 포기하지 않도록 건넨 마음
은평병원은 정신건강의학과를 중심으로 환자를 진료하는 서울시 공공 병원이다. 이곳에는 경제적 형편이 어렵거나 의지할 가족이 없는 환자, 오랜 치료로 가족까지 지친 환자들이 적지 않다. 정신 질환을 드러내기 어려운 사회 분위기 탓에 도움을 요청하는 일조차 쉽지 않다. 제도적 지원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으면서 병원비와 약값을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들도 있다. 치료가 더 필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병원비가 많이 나오면 퇴원하겠다”고 말하는 환자를 만날 때마다 정말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그때마다 대표님께서 마련해주신 기금은 환자들이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힘이 되어주곤 했다. 한두 해 외래 진료를 중단했던 환자에게 “약값은 걱정하지 말고 병원에 오시라”고 말할 수 있었고, 그 환자는 다시 두세 달에 한 번씩 꾸준히 진료를 받기 시작했다. 사랑의열매에 청구하는 금액이 가끔은 1,000원, 1,500원에 불과할 때도 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그 작은 돈은 치료를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든든한 응원이 되었다. 대표님의 기부금은 그렇게 한 사람의 약값이 되고, 다시 병원을 찾을 용기가 되었다.
은평병원 직원들은 기회가 될 때마다
故 김은숙 대표를 찾아 감사 인사를 전하곤 했다.
은평병원 직원들과 함께한 故 김은숙 대표. 김경아 주무관(사진 오른쪽
두 번째)은 인생의 선배로서도 너무 닮고 싶은 분이었다고 기억했다.
숨기지 않은 아픔, 또 하나의 나눔
대표님은 소중한 딸의 아픔도 숨기지 않으셨다. 정신 질환을 감추거나 ‘마음의 병’이라 에둘러 말하는 현실에서도 언론 인터뷰 때면 정확한 병명을 밝히곤 하셨다. 가족의 사연을 세상과 나눈 그 용기는 같은 아픔을 겪는 이들에게 힘이 되었고, 사회의 편견을 걷어내는 또 하나의 씨앗이 되었다. 대표님의 이 같은 헌신은 서울시 봉사상 대상과 오운문화재단 우정선행상 대상, 대한민국 나눔국민대상 국민포장 등의 수상으로 이어지며 우리 사회에 깊은 울림을 남겼다.
그 따뜻한 마음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10여 년 전, 대표님은 딸의 진료를 위해 병원을 찾았다가 생활비가 없어 간식조차 사 먹기 어려운 환자들이 있다는 직원들의 이야기를 우연히 들으시곤 곧바로 “그건 내가 하겠다”고 나서셨다고 한다. 이후 동네 슈퍼마켓에 돈을 보내 환자들에게 필요한 간식을 한 달에 두 번씩 꾸준히 챙겨주셨다. 대표님이 떠나신 뒤에는 아드님께서 그 뜻을 이어 병원에 간식을 보내주고 계신다. 그렇게 대표님의 다정한 안부는 대를 이어 은평병원에 전해지고 있다.
대표님, 오늘도 잘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