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플리마켓의 문을 연 서산장애인주간활동센터 이용자와 센터 관계자들. 판매와 안내를 직접 맡으며 지역 주민과 마주하고, 사회의 평범한 역할을 경험했다.
사회의 평범한 역할이 필요한 사람들
물건을 사고 돈을 건네고, 처음 만난 사람과 인사를 한다. 우리에게는 평범한 일상이지만 성인 발달장애인에게는 이런 경험조차 쉽게 할 수 없다. 학교를 졸업한 뒤 생활 반경이 가정과 복지 기관을 중심으로 좁아지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지역사회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해볼 기회도 줄어들기 때문이다. 안전을 걱정하거나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이유로 주변 사람이 대신하다 보면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며 ‘내가 해냈다’는 성취감을 느끼기도 어렵다. 성인 발달장애인이 사회의 평범한 역할을 직접 경험할 방법은 없을까? 여기, 발달장애인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직접 수행해보는 마켓이 열렸다. 바로 서산장애인주간활동센터(박종애 센터장)가 기획한 ‘느리지만 괜찮은 플리마켓’이다.
지역 소상공인과 참여 팀이 함께 꾸린 ‘느리지만 괜찮은 플리마켓’ 전경.
판매와 체험 등 다양한 부스를 마련해 이용자와 지역 주민이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장을 만들었다.
2025년 9월에 문을 연 서산장애인주간활동센터는 성인 발달장애인이 자신의 능력과 가능성을 발견하고, 자립 생활로 나아가도록 돕는 곳이다. 운동과 요리부터 경제 교육, 미술·공예, 음악, 위생·정리 정돈 교육, 시장·도서관·영화관·체육 시설을 찾아가는 지역사회 체험까지 일상생활에 필요한 힘을 기른다. ‘느리지만 괜찮은 플리마켓’의 아이디어도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하는 지역 행사에서 센터 이용자들이 태권도 공연을 선보인 경험에서 비롯했다. 직접 부스를 꾸리고 운영하며 센터에서 쌓은 배움을 실제 사회적 역할로 이어보자는 생각이었다. 이때 2026년 사랑의열매 ‘소규모 복지 기관 지원사업’에 선정되면서 상상은 현실이 됐다. 그렇게 ‘일상적 지원이 필요한 발달장애인의 사회 참여를 위한 참여형 마켓–가치 있는 주간 활동, 가치(같이)로 여는 마켓’이 첫발을 내디뎠다.
센터 이용자들이 플리마켓을 찾은 지역 주민 앞에서 태권도 공연을 선보이는 모습
배움이 진짜 경험이 되는 마켓으로
마켓을 연다고 곧바로 사회 참여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낯선 손님을 맞고 물건을 설명하고 돈을 주고받으려면 충분한 준비가 필요했다. 센터는 이용자들이 각자의 역할을 익히는 데 가장 공을 들였다. 그 밑바탕에는 평소 이어온 경제 교육과 자립 생활 훈련이 있었다. 화폐를 구분하고 가격의 개념을 익히는 경제 교육, 물건을 사고 필요한 것을 스스로 선택하는 생활 속 연습이 마켓을 준비하며 한층 구체적 경험으로 이어졌다. 실제 동전을 활용해 ‘받기-주기-거스름돈 받기’를 반복하고, 손님에게 인사하고 상품을 설명하는 방법도 익혔다. 판매와 안내 등 필요한 역할을 이해한 뒤에는 모의 마켓을 통해 낯선 상황에 대한 부담을 줄여갔다.
센터 이용자가 직접 판매자로 나서 지역 주민과 물건을 사고파는 모습.
손님을 맞고 상품을 건네며 센터에서 익힌 경제 교육과 자립 생활 훈련을 실제 경험으로 이어갔다.
지역 소상공인과 강사, 참여 팀에도 마켓의 취지를 알렸다. 판매와 체험 및 안내 등 여러 역할이 어우러지도록 구성하고, 이용자들이 단순히 구경하거나 체험하는 데 그치지 않도록 곳곳에 직접 참여할 자리를 만들었다. 바로 이 지점이 ‘느리지만 괜찮은 플리마켓’의 차별점이다. 빠르고 능숙하게 물건을 파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조금 서툴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스스로 해볼 수 있도록 기다리는 것. ‘도움을 받는 참여자’가 아니라 자기 몫을 맡은 마켓의 구성원으로 서는 과정 자체가 가장 중요한 경험이었다. 그렇게 연습하고 또 연습하며 기다려온 9월 11일, 드디어 첫 ‘느리지만 괜찮은 플리마켓’의 문이 활짝 열렸다.
“또 하고 싶어요!”가 남긴 것
‘느리지만 괜찮은 플리마켓’을 함께 만든 센터 이용자와 관계자들이 행사를 마치고 한자리에 모였다.
각자의 역할을 직접 해낸 경험은 “또 하고 싶어요”라는 다음을 향한 기대감으로 이어졌다.
마켓의 문이 열리자 이용자들은 손님을 맞고 물건을 건네며 저마다 맡은 자리에서 주민들과 만났다. 이날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물건을 파느냐가 아니었다. 발달장애인이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판매자와 안내자, 행사를 함께 만드는 구성원으로 지역주민을 만난다는 사실이었다. 주민들 역시 장애에 대해 따로 교육받는 대신 물건을 사고 설명을 듣고 인사를 나누는 평범한 경험 속에서 이들을 자연스럽게 이웃으로 만났다. 서산장애인주간활동센터가 기대한 변화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행사가 끝난 뒤 이용자들은 “다음에는 뭐 해요?”, “또 하고 싶어요”라며 다음을 기약했다. 직접 역할을 맡아 끝까지 해본 경험이 스스로를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여기는 자신감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도를 펼치기 쉽지 않은 소규모 복지 기관의 아이디어가 사랑의열매 지원을 받아 실제 현장이 됐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물론 한 번의 행사로 모든 것이 달라질 수는 없다. 오히려 그래서 이런 경험에는 ‘다음’이 더욱 필요하다. 역할은 반복할수록 익숙해지고, 주민들과 마주하는 시간이 쌓일수록 장애와 비장애 사이의 거리도 좁아진다. 이번 마켓은 하루로 끝났지만 그날 열린 가능성까지 닫힌 것은 아니다. 언젠가 ‘느리지만 괜찮은 플리마켓’이 두 번째, 세 번째 문을 열고, 발달장애인이 지역 곳곳에서 자신의 몫을 수행하는 풍경이 서산의 평범한 일상이 되기를 기대한다.
“발달장애인의 사회 참여 가능성 확인, 가장 큰 성과”
서산장애인주간활동센터 조민아 교사
Q첫 ‘느리지만 괜찮은 플리마켓’을 마친 소감은 어떤가요?
기대만큼 걱정도 컸지만, 이용자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판매하고, 손님을 안내하며, 물건을 정리하고 계산을 돕는 모습을 보면서 걱정이 무색해졌습니다. 무엇보다 이용자들에게 직접 역할을 맡아 해내는 경험과 자신감을 선물할 수 있어 뜻깊었습니다. 행사가 끝난 뒤 “다음에는 뭐 해요?”, “또 하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모습을 보며 이런 기회를 계속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어요.
Q첫 번째 행사인 만큼 준비하면서 어려운 점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약 석 달 동안 장소와 부스 구성, 지역 업체와의 협력, 판매 물품, 홍보 등을 준비했어요. 가장 고민한 건 이용자마다 다른 강점과 특성에 맞는 역할을 찾는 일이었습니다.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거나 물건 정리에 능숙한 분, 숫자에 관심이 많은 분 등 저마다 잘할 수 있는 자리를 찾아주고 싶었거든요. 행사 당일 손님이 한꺼번에 몰리면 긴장하지 않으실까 걱정도 했지만, 오히려 각자의 자리를 지키며 척척 해내는 모습에 저희가 더 놀랐답니다.
Q이용자들의 재능을 살린 특별한 부스도 있었다고 들었어요.
센터에는 시와 수필을 잘 쓰거나 꽃 그림에 재능을 보이는 이용자들이 계세요. 작품을 단순히 전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분들이 직접 작가가 되는 ‘예술인 작가마을’을 마련했습니다. 이용자들이 쓴 글과 그린 그림을 사인지로 제작해 선보이고, 방문객의 요청을 받아 직접 사인도 해드렸죠. 자신의 작품을 소개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평소 센터 안에서만 볼 수 있었던 재능이 밖으로 나와 하나의 역할로 이어지고,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경험이 된 거니까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아닌 ‘작가와 관람객’으로 만날 수 있었다는 점에서도 뜻깊었습니다.
Q행사 중 가장 기억에 남은 순간이 있었나요?
평소 새로운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거는 걸 어려워하던 이용자가 있었어요. 그런데 이날은 손님이 다가오자 먼저 인사를 건네고 상품을 보여주며 설명까지 하더라고요. 계산이 헷갈리거나 잠시 당황할 때도 있었지만, 저희가 대신 해주지 않고 기다리자 스스로 매뉴얼을 다시 확인하고 끝까지 해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실수하지 않는 것’보다 실수해도 다시 해보는 경험이 훨씬 중요하다는 걸 새삼 느꼈어요. 저희에게는 작은 장면이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나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순간이었으니까요.
Q마지막으로, 사랑의열매 지원은 ‘느리지만 괜찮은 플리마켓’에 어떤 의미였나요?
규모가 작은 복지 기관에서는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도 예산이나 여건 때문에 새로운 시도를 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요. 사랑의열매 지원 덕분에 저희도 ‘해보고 싶었던 일’을 처음 현실로 옮길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지원의 결과가 행사나 물품으로만 남은 게 아니라, 이용자들이 직접 역할을 맡아본 경험과 자신감으로 남았다는 점이 가장 뜻깊습니다. 이번 플리마켓을 통해 앞으로 어떤 활동이 필요한지도 확인할 수 있었고요. 첫 시도를 가능하게 해주신 사랑의열매에 깊이 감사드리며, 이런 기회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