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아너

제주에서 피어난 아너 4,000호
故 김을생 아너와 김춘보 아너 가족의
3대(代) 나눔 이야기
나누고 도우며 함께 걷는 길

제주 곶자왈은 흙이 거의 없는 용암 바위 위에서도 생명이 뿌리를 내리고 서로 기대며 숲을 이룬다. 김춘보 아너의 삶을 듣다 보면 문득 그 숲이 떠오른다. 제주4·3사건 이후 멸시와 가난, 추위와 배고픔의 시간을 지나온 그는 자신이 겪은 어려움을 다음 세대에는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 마음은 어머니 故 김을생 아너와 자녀까지 3대(代)를 잇는 나눔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2026년 故 김을생 아너가 사랑의열매 아너 소사이어티 전국 4,000호 회원이 되면서 가족이 함께 걸어온 나눔의 길에 특별한 이정표가 세워졌다.

글 강보라     사진 이승재

김춘보 아너는 어머니 故 김을생 아너를 기리는 마음을 나눔으로 이어가며, 가족의 3대 나눔을 완성했다.
돌 틈에서도 뿌리는 길을 찾는다
제주의 아름다운 풍광에는 쉽게 말할 수 없는 아픈 역사가 새겨져 있다. 제주4·3사건은 1947년부터 1954년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그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주민이 희생된 사건이다. 그날의 기억은 수십 년이 흘러도 쉽게 아물지 않는 깊은 상처로 남았다. 故 김을생 아너 역시 시아버지와 남편을 한꺼번에 잃고, 젊은 나이에 홀로 아들을 키워야 했다.
“어머니는 젊은 나이에 혼자가 되셔서 자식 하나만을 위해 사셨어요. 재가(再嫁)해서 당신의 행복을 찾을 수도 있었겠지만, 한평생 희생하며 강인하게 살아오신 분이죠.”
제주4·3사건 이후 희생자 가족에게 따라붙은 멸시와 핍박도 견뎌내야 했다. 모자는 결국 고향인 남원읍을 등지고 표선면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4·3사건은 제주 곳곳에서 일어난 일이에요. 쉬쉬하며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일이라 오랜 시간 동안 육지까지 닿지도 못했죠.” 김춘보 아너의 어린 시절은 녹록지 않았다. 축사를 간신히 면했을 정도의 집에서 입구를 천으로 막고 살았으며, 자고 일어나면 베개 밑에 눈이 쌓여 있을 만큼 추위도 겪었다. 배고픔 역시 일상이었다.
“그렇게 춥고 배고픈 세월을 보내다가 배부르게 밥을 먹을 수 있게 되니까 남을 돕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겪은 모진 고생을 다음 세대까지 겪게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자신의 배고픔을 기억했기에 다른 이의 어려움을 지나치지 못했던 마음. 김춘보 아너의 나눔은 척박했던 삶의 한가운데서 그렇게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이름 없이 건넨 마음, 얼굴 없는 농민 천사
사랑의열매 윤여준 회장 및 제주 사랑의열매 강지언 회장과 함께한 김춘보 아너의 가입 기념사진
김춘보 아너는 1994년부터 어려운 이웃을 익명으로 돕기 시작했다. ‘얼굴 없는 농민 천사’라는 수식어는 나중에 붙은 말이다. 2014년 평생 농사지으며 모은 2억 원을 기부할 때도 익명을 신신당부했다. 그렇게 아너 소사이어티 전국 708호(제주 25호) 회원이 됐고, 이듬해에는 나눔에 기여한 공로로 ‘대한민국 나눔국민대상’ 국민포장을 받았다.
하지만 그가 기억하는 나눔의 순간은 거창한 기록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남은 작은 장면들이다. 표선면에서 외할머니와 살던 한 초등학생을 정기적으로 지원했는데, 김춘보 아너의 정체를 알게 된 할머니가 좌판을 펴고 장사하다 그를 불러 세웠다.
“반찬거리를 좀 갖고 가라고 하시더라고요. 할머니의 성의를 받았죠. 그리고 그 뒤로는 할머니한테 가서 물건을 샀어요.”
하지만 할머니가 김춘보 아너에게만 자꾸 물건값을 싸게 받자 그마저 그만두고 말았다.
“저한테 싸게 주는 것보다 제값 받고 다른 사람들에게 파는 게 생활에 더 보탬이 될 테니까요.”
김춘보 아너에게 나눔은 일방적으로 베푸는 일이 아니라, 서로 마음을 주고받으며 함께 살아가는 일이었다. 그렇게 이름 없이 시작한 나눔은 어느덧 30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어머니의 이름으로 가입
2014년 아너 회원으로 가입할 당시 김춘보 아너는 아흔 살이던 어머니에게 그 사실을 미리 알리지 못했다. 평생 고생한 어머니에게 농사로 모은 큰돈을 기부한다고 선뜻 말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뒤늦게 아너 가입 사실을 털어놓자 어머니는 “그러잖아도 조금 하려고 했는데… 참 잘했다”며 아들을 격려했다.
“그때 어머니께 미리 말씀드리지 못한 게 한이 됐어요. 언젠가는 어머니 이름으로 아너 가입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죠.”
그 마음을 실천할 계기가 된 것은 제주4·3사건 피해 보상금이었다. 김춘보 아너에게 그 보상금은 쉽게 쓸 수 있는 돈이 아니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목숨값이고, 지난 설움과 울분이 담긴 돈이죠. 그래서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故 김을생 아너가 생전에 기부한 2,600만 원과 피해 보상금 5,000만 원에 김춘보 아너가 2,400만 원을 보태 1억 원을 마련했고, 가족도 뜻을 함께했다. 그렇게 故 김을생 아너는 사랑의열매 아너 소사이어티 전국 4,000호(제주 특별회원 3호)회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김춘보 아너에게 ‘4,000’은 끝을 알리는 숫자가 아니다.
“앞으로 300호가 더해져 4,300호가 되고, 그것으로 4·3사건을 평화롭게 기억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가족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그 기억을 다시 누군가를 돕는 마음으로 건네는 것. 어머니의 이름으로 이어진 나눔에는 그런 바람이 담겨 있다.
아들 김춘보 아너의 뜻으로 아너 소사이어티 전국 4,000호 (제주 특별회원 3호) 회원이 된 故 김을생 아너
나누멍 도우멍 고치 가는 길
김춘보 아너 가족은 故 김을생 아너부터 김춘보 아너, 그의 자녀까지 3대가 나눔을 이어가는 패밀리 아너가 됐다. 김춘보 아너가 다음 세대에 전하고 싶은 것은 기부금의 액수나 아너라는 이름보다 나눔을 대하는 삶의 태도다.
“자기가 나눈 것은 아무리 많아도 나누는 날 잊어버려야 합니다. 대신 도움받은 건 기억해야 해요. 자식들에게도 누군가 건넨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했죠.”
그에게 나눔은 함께 살아가기 위한 일이다. 조금 더 가진 사람이 어려운 사람을 돌아보고, 서로 도우며 살아갈 때 공평한 사회에 가까워질 거라고 믿는다.
“혼자 가면 빨리 갈 수 있지만, 함께 가면 늦더라도 더 멀리 갈 수 있습니다. 함께 걸음을 맞추며 어깨동무하고 같이 가야죠.”
돌 틈에 뿌리를 내린 생명이 서로 기대어 숲을 이루는 제주 곶자왈처럼 한 사람에게서 시작된 마음은 어느새 3대를 잇는 나눔의 숲이 됐다. 그래서 김춘보 아너의 나눔은 오늘도 ‘얼마나 많이’보다 ‘누구와 함께’를 향한다. 아너 4,000호의 새로운 걸음도 그렇게 시작된다. 나누멍 도우멍 고치 가는 길(나누고 도우며 같이 가는 길).